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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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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니엘 분은 1734년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나 노스캐롤라이나로 이주하여 사냥과 모험을 즐기며 자랐다. 프랑스-인디언 전쟁 참전 후 켄터키에서 사냥을 시작하여 윌더니스 로드를 개척하고 분즈보로 마을을 건설했다. 미국 독립 전쟁 중 인디언에게 포로로 잡히기도 했지만 탈출하여 분즈보로를 지켰으며, 버지니아 주 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사업 실패로 미주리로 이주하여 사냥과 탐험을 계속했으며, 1820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대표하는 영웅으로, 다양한 작품과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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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분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체스터 하딩이 그린 다니엘 분의 1820년 초상화
다니엘 분 (1820년 체스터 하딩 초상화)
출생일1734년 11월 2일
출생지펜실베이니아, 올리 계곡
사망일1820년 9월 26일
사망지미주리, 디파이언스
안장 장소프랭크포트 묘지, 프랭크포트, 켄터키 주
또는 올드 브라이언 농장 묘지, 마서스빌, 미주리 주
직업사냥꾼
군인
정치인
측량 기사
상인
배우자레베카 브라이언 (1756년 8월 14일 결혼, 1813년 3월 18일 사망)
자녀10명 ( 제미마, 대니얼, 나탄 포함)
친척스콰이어 분 (형제)
레비 분 (조카)
알폰소 분 (손자)
해나 분 페닝턴 (자매)
서명
정치 경력
직위버지니아 하원 의원
임기 시작1791년 10월
임기 종료1791년 12월
선거구카나와 군
임기 시작1787년 10월
임기 종료1787년 12월
선거구버번 군
임기 시작1781년 10월
임기 종료1781년 12월
선거구페이엣 군

2. 일생

대니얼 분은 1755년 프랑스-인디언 전쟁에 참전했으나, 영국군이 패하면서 노스캐롤라이나로 돌아왔다. 1756년 레베카 브라이언과 결혼 후, 모험과 사냥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1758년 영국-체로키 전쟁 동안 노스캐롤라이나 민병대원으로 활동했다.[1]

1767년 처음 켄터키에서 사냥을 했고, 1769년부터 1771년까지 켄터키에 머물렀다. 1773년 가족과 함께 켄터키로 돌아왔으나, 인디언의 습격으로 아들과 동료를 잃었다.

1775년 트랜실베이니아 회사에 고용되어 윌더니스 로드를 개척하고, 분즈버러를 건설했다. 버지니아 카운티 민병대 대위로서 인디언과 싸웠으며, 1778년 쇼니족에게 붙잡혔다가 탈출하여 분즈보로 포위전에서 활약했다. 버지니아 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사업 실패로 켄터키와 웨스트버지니아의 땅을 잃었다.

이후 미주리로 이주하여 1820년 사망할 때까지 사냥과 탐험을 계속했다. 켄터키는 미국 독립 후 버지니아가 서부 영토를 획득한 최초의 땅이 되었고, 분 부부의 유해는 켄터키에 안장되었다.

강인한 체력으로 인디언과 자연에 맞서 싸운 대니얼 분은 서부 개척 시대의 영웅으로 여겨진다.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가죽 스타킹 이야기』, 존 필슨의 전기, 조지 고든 바이런의 서사시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2. 1. 어린 시절

대니얼 분은 1734년 10월 22일 (그레고리력 11월 2일)에 퀘이커교 가정에서 11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 스콰이어 분(1696~1765)은 1712년경 영국 데번 주 브래드니치에서 펜실베이니아로 이주했다.[2] 직조공이자 대장장이였던 스콰이어는 웨일스 출신 퀘이커 가문 출신인 사라 모건(1700~1777)과 결혼했다. 1731년, 분 가족은 현재 펜실베이니아주 버크스군 올리 밸리에 있는 오늘날 리딩 근처에 단칸짜리 통나무집을 지었고, 그곳에서 대니얼이 태어났다.[3]

분은 어린 시절을 펜실베이니아 변경 지역에서 보냈으며, 종종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교류했다.[4] 분은 현지 정착민들과 원주민들에게서 사냥을 배웠고, 15세가 되자 그 지역 최고의 사냥꾼으로 명성을 얻었다.[5] 분에 대한 많은 이야기는 그의 사냥 기술을 강조한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어린 분은 다른 소년들과 함께 숲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퓨마의 울음소리에 다른 소년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분은 침착하게 소총에 장전을 하고 퓨마가 그에게 뛰어들자 심장을 관통하여 쏘았다. 이 이야기는 민담일 가능성이 있으며, 분의 대중적 이미지의 일부가 된 많은 이야기 중 하나이다.[6]

분의 젊은 시절, 그의 가족은 지역 퀘이커 공동체에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1742년, 분의 부모는 장녀 사라가 임신한 상태에서 비퀘이커(세속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했다. 1747년 분의 큰 형 이스라엘이 비퀘이커와 결혼했을 때, 스콰이어 분은 아들을 지지했고 그 결과 퀘이커에서 축출되었지만, 그의 아내는 자녀들과 함께 매달 모임에 계속 참석했다. 이러한 논란의 결과로, 1750년 스콰이어는 땅을 팔고 가족과 함께 노스캐롤라이나로 이주했다. 대니얼 분은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겼고 모든 자녀들을 세례받게 했다.[7] 분 가족은 결국 현재 노스캐롤라이나주 데이비군인 야드킨 강에 정착했는데, mocksville에서 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이었다.[8]

분은 사냥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는데, 부모의 허락하에 그렇게 했다고 한다. 가족 전통에 따르면, 한 교사가 분의 교육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을 때, 분의 아버지는 "철자는 여자아이들이 하게 하고, 댄은 사격을 하게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분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의 철자는 비정통적이었다. 역사가 존 맥 파라거는 분을 문맹에 가까운 사람으로 보는 대중적 이미지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경고하며, 분은 "당시 대부분의 남성들과 같은 수준의 읽고 쓰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주장했다. 분은 사냥 여행 중에 정기적으로 독서 자료를 가지고 다녔는데, 성경걸리버 여행기가 특히 좋아하는 책이었다. 그는 종종 변경 지역 사람들 중 유일한 문맹이 아니었고, 때때로 모닥불 주변에서 사냥 동료들에게 책을 읽어주며 즐겁게 해주었다.

2. 2. 청년 시절과 결혼

대니얼 분은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변방에서 퀘이커교도 부모에게서 태어나 농부이자 대장장이였던 부모에게서 대장간 기술을 배웠으나, 정규 학교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 13세 때부터 사냥을 시작하여 명사수가 되었고, 1750년 부모와 함께 노스캐롤라이나주로 이주했다. 1755년 프랑스-인디언 전쟁에 참전했다가 영국군이 패하면서 노스캐롤라이나로 돌아왔다.

1756년 8월 14일, 분은 야드킨 밸리의 이웃인 레베카 브라이언과 결혼했다.[1] 부부는 그의 아버지 농장의 오두막에서 살기 시작했고, 슬하에 열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사망한 친척들의 아이들 여덟 명도 함께 키웠다.[1] 분은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시장 사냥꾼, 덫 사냥꾼으로 일하며 모피 무역을 위한 모피를 모았다.[2] 거의 매년 가을, 그는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지속되는 "장기 사냥"을 떠났다.[2] 혼자 또는 소규모 인원과 함께 가을에는 수백 장의 사슴 가죽을 모으고, 겨울에는 비버와 수달을 사냥했으며, 봄에는 상업적 모피 상인들에게 획득물을 팔았다.[2]

1760년대 중반, 야드킨 밸리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사냥감이 줄어들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 분은 채무 불이행으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3] 그는 채권자에게 빚을 갚기 위해 소유했던 토지를 팔아야 했다.[3] 1765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분은 플로리다에 정착할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플로리다로 여행을 떠났다.[3] 가족 이야기에 따르면, 펜사콜라에 토지를 구입했지만, 레베카가 이사를 거부하여 야드킨 밸리의 더 외딴 지역으로 이사했고, 그는 서쪽 블루리지 산맥으로 사냥을 시작했다.[3]

2. 3. 켄터키 정착과 던모어 전쟁

1773년, 분은 가족, 스콰이어 형제, 그리고 약 50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켄터키에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의 첫 정착지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당시 분은 무명이었지만, 이 원정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버지니아 출신의 저명한 인물로, 패트릭 헨리의 매형이 될 윌리엄 러셀이었다.[2] 이 원정대에는 분의 친구이자 오랜 사냥꾼인 마이클 스토너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그룹에는 찰스와 아담을 포함한 알 수 없는 수의 흑인 노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773년 10월 9일, 분의 맏아들 제임스와 여러 백인, 찰스와 아담은 인근 정착지에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주요 부대를 떠났다. 그들은 델라웨어족, 쇼니족, 체로키족으로 구성된 무리의 공격을 받았다. 포트 스탠윅 조약 이후, 그 지역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정착민들의 유입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해 왔다. 파라거에 따르면 이 그룹은 "정착에 대한 반대의 메시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3] 제임스 분과 윌리엄 러셀의 아들 헨리는 고문을 받고 살해당했다. 찰스는 붙잡혔다. 아담은 강둑의 부유물 속에 숨어 이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11일 동안 숲 속을 헤맨 후, 아담은 그 무리의 위치를 찾아 그들의 죽음에 대해 분에게 알렸다. 찰스의 시체는 납치 장소에서 약 64.37k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고, 머리에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4] 살인의 잔혹함은 국경 지대에 충격을 주었고, 분의 일행은 원정을 포기했다.

이 공격은 버지니아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현재의 서버지니아주와 켄터키 주를 장악하기 위해 벌인 던모어 전쟁의 초기 사건 중 하나였다. 1774년 여름, 분은 동료와 함께 켄터키로 가서 그곳의 측량사들에게 전쟁 발발을 알렸다. 그들은 두 달 만에 이상을 여행하여 그 지역에서 아직 도망치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버지니아로 돌아온 후, 분은 클린치 강을 따라 식민지 정착지를 방어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민병대에서 대위로 승진했을 뿐만 아니라 동료 시민들의 칭찬을 받았다. 1774년 10월 버지니아가 포인트 플레전트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 끝난 짧은 전쟁 후, 쇼니족은 켄터키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2. 4. 미국 독립 전쟁

조약으로 켄터키를 잃은 것에 불만을 품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미국 독립 전쟁(1775~1783)을 식민지 주민들을 몰아낼 기회로 여겼다. 고립된 정착민과 사냥꾼들이 빈번한 공격의 표적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켄터키를 떠났다. 1776년 늦봄까지, 분과 그의 가족을 포함하여 200명이 채 안 되는 식민지 주민들이 주로 분즈버러, 해로즈버그, 로건스 스테이션(Logan's Station)의 요새화된 정착지에 남아 있었다.[3]

1776년 7월 14일, 분의 딸 제미마와 다른 두 소녀가 보운즈버러 외곽에서 인디언 전투 부대에 의해 납치되었다. 그들은 소녀들을 북쪽으로 오하이오 지역의 쇼니 마을 쪽으로 끌고 갔다. 분과 보운즈버러의 남성들은 추격에 나섰고, 이틀 후에 그들을 따라잡았다. 분과 그의 부하들은 인디언들을 매복 공격하여 소녀들을 구출하고 납치범들을 몰아냈다. 이 사건은 분의 삶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는 그의 고전 소설 ''마지막 모히칸(The Last of the Mohicans)''(1826)에서 이 에피소드를 각색했다.[4]

칼 페르디난트 비마르(Karl Ferdinand Wimar)의 그림 ''Abduction of Boone's Daughter''(1855년), 아몬 카터 미국 미술관(Amon Carter Museum of American Art)


1777년, 퀘벡의 영국 부총독 헨리 해밀턴(Henry Hamilton)은 켄터키 정착지를 습격할 아메리카 원주민 전투 부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3월, 보운즈버러에서 소집된 버지니아주 켄터키 카운티(Kentucky County, Virginia)의 새로 형성된 민병대에는 10~15명의 노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3] 1778년 4월 24일, 블랙피시 추장(Chief Blackfish)이 이끄는 영국과 동맹을 맺은 쇼니족이 보운즈버러 포위 공격(siege of Boonesborough)을 감행했다. 무장한 노예들은 요새 성벽에서 주인들과 함께 싸웠다. 요새 성벽 너머로 나가 공격자들과 교전하던 중, 노예 중 한 명인 런던이 사망했다.[4]

분은 요새 밖에서 발목에 총을 맞았다.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그는 보운즈버러에 최근 도착한 사이먼 켄턴(Simon Kenton)에 의해 요새 안으로 옮겨졌다. 켄턴은 분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그 자신도 전설적인 개척자가 되었다.

분이 회복되는 동안, 쇼니족은 분스보로 외곽에서 계속 공격을 가하여 가축을 죽이고 농작물을 파괴했다. 식량이 부족해지자 정착민들은 남은 고기를 보존하기 위해 소금이 필요했고, 1778년 1월, 분은 3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링킹 강의 소금샘으로 향했다. 2월 7일, 분이 원정대를 위한 고기를 사냥하던 중 블랙피시의 전사들에게 사로잡혔다. 분의 부대는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기 때문에, 분은 다음 날 블랙피시와 함께 캠프로 돌아와 싸우기보다는 항복하도록 부하들을 설득했다.

블랙피시는 분스보로로 진격하여 점령할 계획이었지만, 분은 여성과 어린이들이 겨울 동안 쇼니족 마을로 포로로 돌아가는 여정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신 분은 분스보로가 다음 해 봄에 자발적으로 항복할 것을 약속했다. 분은 분스보로에 대한 즉각적인 공격을 막기 위해 자신이 허풍을 쳤다는 사실을 부하들에게 알릴 기회가 없었다. 분은 이 전략을 너무 설득력 있게 추진했기 때문에 일부 부하들은 그가 편을 바꿨다고 결론지었고, 이러한 인상은 그를 군사재판에 회부하게 되었다. 많은 쇼니족은 최근 버지니아 민병대에 의한 쇼니족 추장 콘스톡의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포로들을 처형하려고 했다. 쇼니족 추장들은 합의를 추구하며 지도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블랙피시는 회의를 열었다. 분의 열정적인 연설 후, 전사들은 포로들을 살려주기로 결정했다. 분은 부하들을 구했지만, 블랙피시는 분이 자신을 합의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지적했기 때문에, 분은 전사들을 통과하는 장갑을 뚫고 달리는 시련을 치러야 했고, 그는 경상을 입고 살아남았다.

세실 B. 하틀리(1859)의 ''라이프 앤 타임스 오브 콜. 대니얼 분''에서 발췌한 쇼니족에 의한 분의 의례적 입양 그림


분과 그의 부하들은 블랙피시의 마을인 칠리코시로 끌려갔다. 쇼니족의 관습대로, 그들은 전사들을 대신할 포로들을 입양했다. 분은 칠리코시의 쇼니족 가족, 아마도 블랙피시의 가족에게 입양되어 쉘토위(큰 거북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778년 3월, 쇼니족은 입양되지 않은 포로들을 디트로이트의 해밀턴 주지사에게 데려갔다. 블랙피시는 분을 데려왔지만, 해밀턴이 분을 영국군에게 넘겨주려는 제안을 거절했다. 해밀턴은 분에게 선물을 주며 충성심을 얻으려고 했고, 분은 계속해서 분스보로를 항복할 의향이 있다고 가장했다. 분은 블랙피시와 함께 칠리코시로 돌아왔다. 1778년 6월 16일, 블랙피시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분스보로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분은 포로들을 피해 집으로 달려갔고, 말을 타고 약 257.49km에 달하는 거리를 5일 만에 주파했고, 말이 지쳐 쓰러진 후에는 대부분 걸어서 돌아왔다. 전기 작가 로버트 모건은 분의 탈출과 귀환을 "국경 역사의 위대한 전설 중 하나"라고 부른다.

분이 분스보로로 돌아오자, 일부 부하들은 그가 몇 달 동안 쇼니족과 행복하게 살았기 때문에 분의 충성심에 의문을 제기했다. 분은 오하이오 강 건너편 쇼니족에 대한 선제적인 습격을 이끌고, 1778년 9월 7일에 시작된 블랙피시가 이끄는 10일간의 공성전에서 분스보로를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이에 응답했다. 공성전 이후, 분이 항복시킨 포로 중 조카가 있는 벤자민 로건 대위와 리처드 캘러웨이 대령은 분의 최근 행동에 대해 고발했다. 그 후 있었던 군사재판에서 분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법정에서 그의 증언을 들은 후 승진까지 했다. 이러한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분은 군사재판으로 굴욕을 당했고, 그는 그것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재판 후, 분은 가족을 켄터키로 데려가기 위해 노스캐롤라이나로 돌아왔다. 1779년 가을, 미래 대통령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 링컨 대위의 가족을 포함한 많은 이주민들이 그와 함께 왔다. 분은 분즈버러에 머무르는 대신 인근에 분의 정착지를 세웠다. 그는 다른 정착민들을 위해 좋은 땅을 찾아 돈을 벌기 시작했다. 버지니아가 켄터키 카운티를 설립한 후 트랜실베이니아 토지 청구는 무효화되었으므로 정착민들은 버지니아에 새로운 토지 청구를 제출해야 했다. 1780년, 분은 여러 정착민들로부터 약 2만 달러의 현금을 모아 윌리엄스버그로 가서 그들의 토지 증서를 구입했다. 여행 중 여관에서 자고 있는 동안 그의 방에서 현금이 도난당했다. 일부 정착민들은 분의 손실을 용서했지만, 다른 정착민들은 그가 훔친 돈을 갚을 것을 고집했고, 그에게는 몇 년이 걸렸다.

후대의 민중 이미지와는 달리, 분은 "문명화된" 사회와 거의 친밀하지 않은 오지 사람이었지만, 이 시대 켄터키의 주요 시민이었다. 1780년 11월 켄터키가 버지니아의 세 카운티로 나뉘었을 때, 분은 페예트 카운티 민병대의 중령으로 승진했다. 1781년 4월, 그는 리치먼드에서 열린 버지니아 총회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1782년에는 페예트 카운티 보안관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미국 독립 전쟁은 계속되었다. 분은 1780년 오하이오 지역에 대한 조지 로저스 클라크 장군의 침공에 참여하여 8월 7일 쇼니족과의 피콰 전투에서 싸웠다.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분은 그의 형제 네드와 함께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쇼니족이 다니엘과 닮은 네드를 쏘아 죽였다. 쇼니족은 네드가 다니엘이라고 믿고 그의 머리를 잘라 다니엘 분이 마침내 죽었다는 증거로 가져갔다.

1781년, 분은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리치먼드로 갔지만, 바나스트레 타를턴휘하의 영국 용기병들이 샬롯츠빌 근처에서 분과 다른 여러 입법자들을 사로잡았다. 영국군은 며칠 후 가석방으로 분을 석방했다. 분의 임기 동안, 콘월리스는 1781년 10월 요크타운 공방전에서 항복했지만, 켄터키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분은 켄터키로 돌아와 1782년 8월 블루릭스 전투에서 싸웠는데, 이 전투는 켄터키인들에게 참패였고 분의 아들 이스라엘이 사망했다. 1782년 11월, 분은 클라크가 이끄는 또 다른 오하이오 원정에 참여했는데, 이는 전쟁의 마지막 주요 원정이었다.

2. 5. 독립 전쟁 이후

미국 독립 전쟁 이후, 분은 오하이오 강 항구였던 림스톤(현재의 메이즈빌)에 정착하여 여관 운영, 측량, 말 거래, 토지 투기 등을 했다. 1784년, 존 필슨의 ''켄터키의 발견, 정착 및 현재 상태'' 출판으로 분은 유명 인사가 되었다.[4]

켄터키 정착민 증가로 국경 전쟁이 재개되자, 1786년 분은 벤자민 로건의 군사 원정에 참여했다. 이후 포로 교환 협상을 도왔으며, 8년 후 폴른 팀버스 전투 승리로 전쟁은 끝났지만, 이것이 분의 마지막 군사 활동이었다.

분은 림스톤에서 노예를 소유하며 번영했다.[4] 1786년에는 펜실베이니아 출신 노예를 구입하기도 했다.[4] 민병대 대령, 보안관, 검시관 등으로 일했고, 1787년 버번 카운티 대표로 버지니아 주 의회에 선출되었다.[4] 그러나 토지 투기 실패와 사업 감각 부족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4]

1789년, 분은 포인트 플레전트로 이주하여 무역소를 운영하고 측량 조수로 일했다. 카나와 카운티 민병대 중령, 버지니아 주 의원을 지냈으나, 빚 때문에 상점을 닫고 사냥과 덫 놓는 일로 돌아갔다.[4]

1795년, 분 부부는 켄터키 니콜라스 카운티로 돌아왔다. 분은 아이작 셸비 주지사에게 황야 길 확장 계약을 신청했으나 실패했다.[4] 토지 소유권 소송이 계속되었고, 분은 남은 토지를 매각하며 법정에 무관심해졌다. 1798년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으나, 보안관은 그를 찾지 못했다.[4] 같은 해, 켄터키 의회는 분 카운티를 명명했다.[4]

2. 6. 말년과 죽음

법적, 재정적 어려움을 겪은 분은 미국을 떠나 새 출발을 하려 했다.[5] 1799년, 그는 대가족과 함께 당시 스페인령 루이지애나의 일부였던 현재 미주리주 세인트찰스군으로 이주했다.[5] 인구가 적은 지역에 정착을 장려하기를 원했던 스페인은 모든 이민자가 가톨릭 신자여야 한다는 공식적인 요구 사항을 시행하지 않았다. 스페인 총독은 분을 "시장(syndic)" (판사 겸 배심원)이자 펨 오세이지 지역의 사령관(군 지휘관)으로 임명했다.[5] 분이 시장으로 재직했던 일화는 그가 법의 문자 그대로를 엄격하게 준수하기보다는 공정한 판결을 내리려고 했다는 것을 시사한다.[5]

분은 1804년 미주리가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미국령이 될 때까지 시장 겸 사령관으로 일했다. 그는 지역 민병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다.[5] 분의 스페인 정부로부터의 토지 증서가 대부분 구두 합의에 근거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토지 청구권을 상실했다. 1809년 그는 의회에 스페인 토지 청구권을 회복해 달라고 청원했고, 마침내 1814년에 이루어졌다. 분은 켄터키의 오래된 빚을 갚기 위해 이 토지의 대부분을 매각했다. 1812년 전쟁이 미주리에 도달했을 때, 분의 아들인 대니얼 모건 분과 네이선 분이 참전했지만, 그때 분은 민병대 복무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5]

분은 미주리로 이주한 후 켄터키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알려졌지만, 그가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기 위해 켄터키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다는 이야기(민담일 가능성이 있음)가 전해진다.[5] 미국의 화가 존 제임스 오듀본은 1810년경 켄터키에서 분과 함께 사냥을 갔다고 주장했다. 수년 후, 오듀본은 기억을 바탕으로 분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주장했지만, 회의적인 사람들은 그의 그림이 체스터 하딩의 잘 알려진 초상화와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했다.[5] 일부 역사가들은 분이 1810년 켄터키 근처에 있는 그의 형제 스콰이어를 방문했다고 믿고 오듀본의 설명의 진실성을 받아들였다.[5]

알론조 채플이 1861년경에 제작한 이 판화는 미주리에서 사냥하는 노년의 분을 묘사하고 있다.


분은 미주리에서 마지막 세월을 보냈고, 자녀들과 손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건강과 체력이 허락하는 한 사냥과 덫을 계속했고, 한때 그를 사로잡고 모피를 압수했던 오세이지족의 영토를 침범하기도 했다.[5] 1810년, 76세의 나이에 그는 6개월 동안 미주리 강을 따라 옐로스톤 강까지, 약 3218.68km가 넘는 왕복 여행을 하는 그룹과 함께 사냥을 떠났다고 한다.[5] 그는 1815년 쇼니족과 그의 말년에 자주 함께했던 노예인 데리 코번과 함께 마지막 사냥 여행 중 하나를 시작했다.[5] 그들은 1816년 포트 오세이지에 도착했고, 한 장교는 "우리는 분 대령의 방문으로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는 브래독 전쟁부터 현재까지 미국의 모든 전쟁에 참전했습니다."라고 썼지만, "그는 숲을 선호하며, 가장 거칠고 가난한 사냥꾼의 차림으로 그를 볼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5]

분은 1820년 9월 26일 미주리주 펨 오세이지 크릭에 있는 아들 네이선 분의 집에서 사망했다. 사냥 중에 사망하여 다음 날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5] 그는 1813년 3월 18일에 사망한 레베카 옆에 묻혔다. 1830년대 중반까지 무표지였던 무덤은 현재 마사스빌에서 약 약 3.22km 떨어진 투크 크릭에 있는 젬마(분) 캘러웨이의 집 근처에 있었다.

1845년, 분 부부의 유해는 발굴되어 새로운 묘지인 켄터키주 프랭크퍼트에 다시 매장되었다. 미주리주에서는 유해 발굴에 대한 불만이 수년에 걸쳐 커졌고, 분의 유해는 미주리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미주리주에 있는 분의 묘비는 실수로 잘못된 무덤 위에 놓였지만 아무도 그 실수를 바로잡지 않았고, 켄터키주 사람들이 분의 유해를 발굴하러 왔을 때 불쾌하게 생각한 분의 미주리주 친척들은 그 실수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켄터키주 사람들이 잘못된 유해를 발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동시대의 증거는 없지만, 1983년에 법의 인류학자가 켄터키주 재매장 전에 만들어진 분의 두개골의 조잡한 석고 주형을 조사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두개골일 수 있다고 발표했다. 투크 크릭에는 흑인 노예들도 묻혔기 때문에, 혼잡한 묘지에서 잘못된 유해가 실수로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켄터키주 프랭크퍼트 묘지와 미주리주 올드 브라이언 농장 묘지 모두 분의 유해가 있다고 주장한다.[5]

3. 문화적 유산

대니얼 분은 미국 역사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초기 미국 민중 영웅으로서의 지위와 후대의 허구적 묘사로 인해 실제 삶이 가려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존 펄슨의 "대령 대니얼 분의 모험"이라는 작품 덕분에 전설적인 인물로 부상했는데, 이 책은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번역되어 미국과 유럽에서 분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펄슨의 책은 분을 미국의 최초의 인기 영웅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6]

티모시 플린트의 "켄터키 최초 정착민 대니얼 분의 전기적 회고록"(1833)은 19세기 베스트셀러 전기 중 하나였다. 플린트는 분의 모험을 과장하여, 분이 곰과 싸우고, 덩굴에 매달려 인디언들로부터 도망치는 등의 이야기를 담았다. 분의 가족은 그 책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러한 과장된 이야기들이 수많은 다임 소설과 어린 소년들을 위한 책들에서 반복되었다.[6]

존 제임스 오듀본(John James Audubon)의 1810년 이후 Boone 초상화


펄슨의 책 덕분에 분은 자연 속에서 정직하고 단순한 삶을 사는 "자연인"의 상징이 되었다. 조지 고든 바이런의 서사시 ''돈 주앙''(1822)에서는 문명을 등지고 행복을 찾은 사람으로 분을 찬양했다. 그러나 분은 말년에 "내가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은퇴한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이 돌아다니는 것만큼 나의 노년을 괴롭히는 것은 없다."라고 말하며 이러한 해석을 거부했다.[6]

분은 사회로부터 도피하는 사람으로 묘사되는 동시에, 문명의 개척자로 칭송받기도 했다. 명백한 운명의 대리인으로서 야생을 길들이고 미국 문명의 확장을 위한 길을 닦았다는 것이다. 1852년 비평가 헨리 터커먼은 분을 "숲의 콜럼버스"라고 부르며, 분이 컴벌랜드 갭을 통과한 것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세계로 항해한 것에 비유했다. 대중적 신화 속에서 분은 켄터키를 탐험하고 정착한 최초의 인물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뒤따를 수 있는 길을 열었다.[6]

19세기, 원주민들이 땅에서 쫓겨나 보호구역에 수용되었을 때, 분의 이미지는 종종 호전적이고 인디언을 증오하는 개척자의 고정관념으로 재구성되었다. 존 A. 맥클렁의 ''서부 모험 스케치''(1832)에서 분은 "야만적인 전쟁의 스릴 넘치는 흥분"을 갈망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실제 분은 유혈 사태를 싫어했고, 인디언들을 존중했으며 인디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미주리에서 분은 수십 년 전 자신을 사로잡고 입양했던 쇼니족과 함께 사냥을 갔다.[6] 일부 19세기 작가들은 분의 인디언에 대한 동정심을 성격적 결함으로 여기고 당시의 태도에 맞춰 그의 말을 바꾸었다.[6]

3. 1. 대중문화

대니얼 분은 미국 역사에서 신화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위대한 영웅으로 남아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책이 출판되었고, 그의 모험을 주제로 삼아 그린 그림들도 많이 있다. 분의 사망 이후 그에 대한 신화화 작업은 계속되었다. 인디언과 맞서 싸우고 위기를 지혜롭게 헤쳐나간 그의 모습을 통해서 분을 미국적인 것의 표준으로 삼았다.[6]

페니모어 쿠퍼의 소설 ''가죽 스타킹 이야기''의 주인공은 분을 모델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쿠퍼의 두 번째 ''가죽 스타킹'' 소설인 ''모히칸족의 최후''(1826)에는 분이 자신의 딸을 구출하는 허구적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쿠퍼 이후 다른 작가들은 서부 영웅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다니엘 분의 변형으로 시작되었다.[6]

존 필슨의 『켄터키의 발견과 식민과 현황』이라는 분의 전기는 유럽에서도 읽혔고,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 서사시 『돈 주앙』에서 분을 칭찬한 이후 그 이름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7] 20세기에도 수많은 만화, 라디오 프로그램, 영화에서 종종 주제화되었으며, TV 시리즈로도 제작되는 등 미국 문화에서 대니얼 분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6]

1936년 영화 ''다니엘 부운''[6]과 멕시코에서 촬영된 1956년 영화 ''다니엘 부운, 개척자''(당시의 유행이었던 ''데이비 크로켓: 야생의 국경의 왕'')가 그 예시이다. 부운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방영된 TV 시리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6] 그는 또한 에드 에임스가 부른 "다니엘 부운"이라는 노래의 주제가 되었다. 이 노래는 1966년에 발매되었다.

아서 가이터먼은 4절짜리 시에서 부운의 일생을 회상하며, 그의 유령이 고대와 신화적인 동물들을 은하수를 가로질러 행복하게 추적하는 것으로 끝맺는다.[6] 2021년에 출판된 매슈 펄의 ''제미마 부운의 납치''는 다니엘 부운의 딸 납치 사건과 부운에 의한 구출 이후, 부운과 그의 정치적 라이벌인 리처드 캘러웨이, 쇼니족 지도자 블랙피시 사이의 갈등과 그에 따른 미국 독립 전쟁 서부 전선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다.[7]

3. 2. 기념

대니얼 분은 미국 역사에서 신화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위대한 영웅으로 남아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책이 출판되었고, 그의 모험을 주제로 삼아 그린 그림들도 많이 있다. 분의 사망 이후 그에 대한 신화화 작업은 계속되었다. 인디언과 맞서 싸우고 위기를 지혜롭게 헤쳐나간 그의 모습을 통해서 분을 미국적인 표상으로 삼았다.[6]

가족을 지키는 대니얼 분(1874)


그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소설 《모히칸족의 최후》(1826)는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20세기에도 수많은 만화, 라디오 프로그램, 영화에서 종종 주제화되었다. 최근에는 TV 시리즈로도 제작되는 등 미국 문화에서 대니얼 분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7]

1968년 부운 기념 우표


헨리 어거스터스 루커먼이 디자인하고 1934년부터 1938년까지 주조된 미국 다니엘 부운 200주년 기념 반달러의 앞면


미국의 많은 지역이 부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여기에는 켄터키주의 다니엘 부운 국유림과 테네시주의 셸토위 트레이스 트레일이 포함된다.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미국의 자연과 동의어로 여겨져 왔다. 부운 앤드 크로켓 클럽은 1887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설립한 환경 보호 단체이며, 다니엘 부운의 아들들은 미국 보이스카우트의 전신이었다. 부운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1934년에는 반달러 동전이 주조되었고, 1968년에는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1961년 미국 해군은 USS ''다니엘 부운'' (SSBN-629) 잠수함을 건조하여 1964년 취역시켰고, 1994년 퇴역할 때까지 운용하였다. 이 잠수함의 모토인 "새로운 길을 개척하라"는 부운의 삶과 국경 개척에 대한 그의 위대한 유산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 것이었다.

부운의 모험담은 실제와 신화적인 이야기가 혼합되어 19세기 소설과 20세기 영화에서 인기 있는 미국 서부의 전형적인 영웅의 기반을 형성했다. 1823년에 처음 출판된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가죽 스타킹 이야기''의 주인공은 부운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으며, 그의 이름인 네이선얼 범포조차도 다니엘 부운의 이름을 연상시켰다.

20세기에는 부운이 수많은 만화, 라디오 프로그램, 소설, 영화에 등장했는데, 1936년 영화 ''다니엘 부운''과 1956년 영화 ''다니엘 부운, 개척자''가 그 예시이다. 부운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방영된 TV 시리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아서 가이터먼은 4절짜리 시에서 부운의 일생을 회상하며, 그의 유령이 고대와 신화적인 동물들을 은하수를 가로질러 행복하게 추적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2021년에 출판된 매슈 펄의 ''제미마 부운의 납치''는 다니엘 부운의 딸 납치 사건과 부운에 의한 구출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참조

[1] 잡지 Daniel Boone in the General Assembly https://richmondmaga[...] 2021-03-11
[2] 웹사이트 Michael Stoner: The Frontiersman Who Was Always There https://www.varsityt[...] 2021-11-02
[3] 학술지 African Americans on the Kentucky Frontier 1997
[4] 서적 A history of Blacks in Kentucky : from slavery to segregation, 1760–1891 https://www.worldcat[...] Kentucky Historical Society
[5] 뉴스 Image 2 https://chroniclinga[...] Big Sandy News (Louisa, KY) 1888-03-15
[6] 웹사이트 Daniel Boone https://www.poetryno[...]
[7] 뉴스 What the Kidnapping of Daniel Boone's Daughter Tells Us About Life on the Frontier New York Times 2022-01-06
[8] 웹사이트 Daniel Boone American frontiersman 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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